2009년 7월 5일 일요일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

타인의 삶
(Das Leben Der Anderen)



과목 : 독일문화2
담당교수 : 김수정 교수님
발제자 : 2006006015 박형락


Die Stasi war mein Eckermann oder: mein Leben mit der Wanze - Erich Löst

1. 영화 ‘타인의 삶’에 대하여...
2007 아카데미 외국어 부문 영화상과 골든 글로브 그리고 독일아카데미 영화상등 많은 상을 받은 영화다. 최우수상, 감독상, 영화상, 남우주연상, 남우조연상, 여우조연상, 편집상, 각본상 등 다양한 부분에서 인증을 받았다. 무차별적인 불법 도ㆍ감청을 통한 국가권력의 통제가 절정에 달했던 통일 전 냉전시대의 동독. 영화는 사상 검증을 이유로 끊임없이 감시해야하는 비밀경찰 즉 슈타지가 남의 사생활을 몰래 보고 들으면서 점점 피 대상자에게 동화되어 가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렸다. 두 타인은 서로 모르는 사이이지만 결국 서로에게 영향을 주게 되고 긴장관계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준다. 우리나라에 상영된 영화와 DVD 그리고 자막파일의 내용들은 안타깝게도 한국 사람들이 읽기엔 너무 생소하고 이해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편집하거나 오역한 부분이 있어 필자로서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우연히 인터넷에서 이에 뜻한바 있는 네티즌이 만든 자막을 구했지만 너무 늦어서 기존의 자막과 공유했음에 양해 바란다. 정식 방영된 국문자막이 아닌 경우 밑줄로 표시하겠다. 그리고 재생시간을 따로 표시했으니 비교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2. 영화를 보지 말고.. 읽기 전에..
1) 스톡홀름 증후군
스톡홀름 증후군은 인질이 범인에게 동조하고 감화되는 비이성적인 심리 현상이다. 인질이 아니더라도 일부 매 맞는 아내, 학대받는 아이들도 이와 비슷한 심리 상태를 나타낸다고 한다. 이 용어는 1973년 8월 23일 부터 8월 28일까지 스톡홀름 노르말름스토리의 크레디트반켄 은행을 점거하고 은행 직원을 인질로 잡았던 노르말름스토리 사건에서 이름을 따왔다. 인질들은 범인들에게 정서적으로 가까워졌고, 6일 동안 인질로 잡혔다가 풀려났을 때에는 인질범들을 옹호하는 발언도 했다. 범죄학자이자 심리학자인 닐스 베예로트가 뉴스 방송 중에 이 현상을 설명하면서 처음으로 ‘스톡홀름 증후군’이라는 용어를 처음으로 썼다.
2) 국가 공안국 (Ministerium fur Staatssicherheit)
슈타지 (Staatssicherheit) 라고도 한다. 초기에는 국가공안국(STASI)을 국가공안보위(Staatssicherheitsdienst)의 약자로 칭하기도 하였다. 국가공안국은 동독의 보안 비밀경찰과 첩보조직이었다. 국가공안국 본부는 동베를린에 있었으며, 리히텐부르크의 확장 조직을 비롯한 여러 소규모 조직들이 도시 전체에 깔려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이 첩보기관은 세계에서 가장 효과적이었던 기관으로 평가받고 있다. 국가공안국의 모토는 당의 방패와 검(Schild und Schwert der Partei)이었는데, 이는 이 기관이 소련의 공산당에 해당하는 동독의 독일사회주의통일당과 연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3) 사천의 선인 - 브레히트의 작품 (Der gute Mensch von Setzuan)
신의 계명을 지키는 선인을 찾기 위해 여행하는 세 명의 신들에게 물장수 왕은 숙소를 구해주려고 애쓰지만 가는 집마다 거절당한다. 마침내 그들은 창녀인 셴테의 집에 묵게 된다. 신들은 선한 여인을 발견했다고 안심하며 떠난다. 신들이 준 돈으로 셴테는 작은 담배 가게를 마련하려고 하자 몰려드는 빈민들의 요구에 할 수 없이 셴테는 교활한 가공의 사촌 오빠 슈이타로 변장하여 위기를 피한다. 셴테는 직장이 없는 비행사 양순과 사랑에 빠져서 그를 돕지만 양순의 애정 없는 계산으로 결혼이 좌절된다. 임신한 그녀는 태어날 아이를 구하려는 생각에 다시 슈이타로 변장하고 부자 이발사의 재산과 빈민들의 노동력을 이용하여 담배 공장을 차린다. 사업은 번창하는데 셴테가 오랫동안 보이지 않자 슈이타가 공장을 빼앗으려고 사촌 여동생을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고발당한다. 10장에서 신들이 재판관으로 나온 법정에서 슈이타는 자신이 셴테와 동일 인물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착하게 살아나가기가 힘들다는 그녀의 호소에 신들은 어떤 해결책도 제시하지 못하고 다시 승천한다.

* 여러 분야로 나누었지만 내용 중복을 피해 만약 연관된 상황이 있으면 같이 설명하도록 하겠다. 예를 들어 주인공 특징의 대사 분석에서 이와 연관된 동독의 특징이 있으면 언급을 하여 다음 장에서 중복하는 것을 피하겠다는 뜻이다. *
* 정식 국문 자막 : 이하 A , 네티즌 자막 : 이하 B *

2. 대사를 통한 주인공의 특징
1) 게르트 비즐러
a. “결백한 사람은, 자신이 저지르지 않은 일로 오랫동안 심문을 받으면 분노에 휩싸이거나 자살을 하려고 하지 반면에 죄가 있는 사람은 종종 말하기를 거부하거나 운다. 자신이 그곳에 있는 이유를 정확하게 알기 때문이지 유죄인지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모든 걸 인정할 때까지 심문하는 거야” (3:00) - 비즐러는 국가공안국의 일원으로써 충실히 피의자를 캐냄과 동시에 이와 관련된 전문적 지식이 해박함을 알 수 있다. 또한 그가 자신에게 질문한 학생에게 표시한 이유는 교사와 학생의 관계에서의 질문 즉 정부와 인민 관계에서 인민의 의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에서 체제를 의심하는 인민에 대한 응징의 표시라고 할 수 있다.
b. “자넨 아는 게 있나? 그들은 동독의 40주년 기념을 위한 새 희곡을 쓰고 있는 거야” “그런 것 같지는 않은데요 그럼 뭐 같은가?” “희곡은 분명히 아니에요 동지,” “자넨 생각이 너무 많아” (1:13:43) “난 혼자 일하는 게 좋네” “왜?” “이제 거의 끝에 다다른 것 같네 나 혼자서도 할 수 있어 라즐로를 미행할 수도 있고 밖에서 일할 때도 있거든” (1:19:53) “배후에 누가 있는지 아나? 어떻게 생각하나?” “드라이만이 쓴 것 같지는 않네, 그건 불가능해” (1:28:11) - 주인공이 점점 드라이만의 편에 서서 감싸주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는 주인공이 예술을 통해 알게 된 드라이만을 예술을 통해 점점 그와 크리리스타 사이의 관계 속으로 빠져 들어가고 결국 그를 보호해주며 예술로써 그의 삶 자체를 변화시키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2) 게오르그 드라이만
a. “하지만 전 이 나라를 사랑합니다. 연극을 볼 때, 정치는 잠시 잊으실 수 없겠습니까? 모두가 같은 신념을 공유하는 건 불가능 합니다.” (14:14)”사람들은 지위가 아닌……. 양심의 소리를 들을 겁니다. 희망을 빼앗겨선 안 됩니다.” (15:28)”건배! 모든 독일인에게 동독의 진실을 밝히기 위하여!” (1:17:02) - 동독의 충성파에 속하지만 예술의 자유 그 하나만의 생각으로 서독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b. "나 알고 있었어. 당신이 어디로 가려는지 알고 있단 말이야. 부탁할게.제발 가지마. 당신에겐 그가 필요치 않아. 필요 없다고……. 당신 약들에 대해서도 알아. 그리고 당신이 얼마나 당신의 예술성을 믿지 않는지도. 적어도 내말만은 믿어줘. 크리스타 마리아……. 당신은 위대한 예술가야. 난 그걸 알아. 그리고 당신의 관객들 역시 그걸 알고 있고……. 당신은 그자가 필요치 않아. 필요치 않다고……. 여기 있어. 그에게 가지 마." (55:17) - A와 B 서로 비슷한 내용이다. 하지만 다른 점은 B는 드라이만이 크리스타 스스로가 자신이 예술성을 믿지 않는 다고 말한다. 즉 순수하게 남의 시선 아랑곳 않고 자신의 길을 위해 나갈 수 있는 예술의 자유를 능력 때문이 아니라 상황이 못하는 것임을 말한다. 이로써 드라이만은 크리스타에게 자신의 길과 함께 가는 동반자로써 크리스타와 함께 가길 원한다.
3) 크리스타 마리아 질란트
a. “하지만 당신은 어떡하고? 자유를 포기할 거야? 당신 마음껏 글만 쓰면서 살 수도 있겠지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않지? 당신은 그렇게 살 수 없다는 걸아니까, 사람은 신념만으로 살 수는 없어 우리가 뭘 할 수 있지? 어떻게 해야 할까? 당신도 예르스카처럼 되고 싶어? 난 싫어 그러니까 가야 돼” (56:39) - 예술의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하는 드라이만과는 다르게 크리스타는 어느 규정된 틀 안에서 예술을 하는 현실주의적인 모습을 띈다.
b. 난 너무 약했어……. 내가 한 짓을 이제 더 만회할 수가 없게 되었어. (Ich war zu schwach... Ich kann nie mehr gutmachen, was ich getan habe) (1:49:44) - 이 대사는 A와 B에 나와 있지 않다. A와 B에서는 비즐러가 타자기를 가르쳐 준다면 드라이만은 물론이고 크리스타 자신에게도 정부에게 처벌을 면제받는다고 약속했고 이에 크리스타가 가르쳐줬지만 비즐러가 타자기를 숨기는 바람에 드라이만을 위해서라도 자살의 길을 선택해서 원망의 말을 했다. 하지만 위의 대사는 다른 네티즌의 대사인데 자신이 너무 나약해서 정부와 손을 잡았고 결국 둘다 처벌을 받게 될 것임이 틀림없기 때문에 자살과 함께 후회로써 위처럼 말을 한게 아닌가 하는 분석이다.
4) 알버트
a. “더 이상 이 나라를 참을 수가 없어, 인권도 없고 언론의 자유도 없지 모든 시스템이 날 미치게 해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 나라에 사는 사람들의 실제 삶에 대해서 우리에게 글을 쓰도록 영감을 주는 것도 같은 시스템이지 우리의 양심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진정한 걸작이야 난 정말 이런 게 싫어 다음 생에서 다시 작가로 태어나면 좋겠어” (23:11) - 우선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 앞 대사에 A의 경우에는 그냥 간단한 공연에 대한 이야기로 끝나는 데 B의 경우 슈바이버의 첫 공연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한다. 슈바이버란 인물은 파티장면에서 하우저랑 말싸움을 하는 동독의 앞잡이 인물인데 이가 알버트의 작품을 훔친 인물이라고 언급한다. 아무튼 위의 대사를 통해 알버트는 동독체제에 환멸을 느끼는 모습이다. 참고로 B의 자막에는 위 글과는 같은 작가에게 당한 배신과 동독정부에 대한 부정이 나타난다.
5) 헴프
a. “당신 말대로, 한 사람의 사랑과 신념이 연극 하나로 바뀌지는 않소 당신 마음대로 써봐, 사람들의 마음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거든” (15:08) - 예술을 비하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 대사와 그가 예술 통제에 집착하는 행동을 본다면 상당히 모순적인 말이다. 브레히트의 학습 극처럼 사람의 사상을 변화 가능케 할 수 있기 때문에 그는 드라이만을 경계할 수밖에 없는 인물로 나온다.
b. “타시오, 어서! 어떻게 하는 게 신상에 좋은지 잘 알겠지 그러니 숙고해서 잘 선택해요 당신의 차가움 때문인가 날 이토록 미치게 하는 것이” “왜 이래요?” “집에 빨리 들어가고 싶으면 반항하지 마시오, 착하게 굴면 집에 일찍 보내주겠소” (39:06) - 그는 예술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지만 예술을 사랑하는 인물로 보여 진다. 오히려 너무 집착하는 나머지 여주인공을 가지고 싶어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의 행동을 통해 스탈린주의의 문제점인 중간 정부조직의 권력의 집중에 대한 폐해를 보여준다.
6) 하우저
a. “자넨 이상적이야, 그거 알아? 언제부터 현실에서 도피했나? 저 사람들 때문에 자넨 변했어, 독재 치하의 삶에 익숙해졌다고 그렇다면 자넨……. 세상을 살아갈 자격이 없어 (31:12)” - 동독이 처한 상황을 생각한다면 그는 철저한 이상주의자다. 하지만 실현가능하다는 확신만큼은 가지고 있는 듯하다.
7) 그루비츠
a. “독일민주공화국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나라인데 말이야” (7:02) - 사회주의를 신봉하는 인물이다. 여기서 그의 사상이 스탈린주의임을 엿볼 수 있다. 이는 동독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상징되어진다. 스탈린주의를 짧게 설명하자면 인민중심이 아닌 관료중심이 그 예이다. 이는 에리히 뢰스트의 ‘니콜라이 교회’에서 더욱 그 모습을 찾을 수 있다.
b. “개인사는 상대 정당에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어 장관이나 우리나 공산주의자야, 우리 당이 망신을 당했으면 좋겠나?” (35:36) - 그는 사적으로는 장관을 싫어함이 분명하나 전체를 위해서 당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묵살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당 중심적인 스탈린주의가 느껴진다.
c. “이번 임무는 실패야 자네의 도청 경력도 끝이고 편지 감시부로 좌천될 거야 편지 봉투를 열고 그게 조사되기만을 기다리는 게 자네 일이지 그 짓을 앞으로 20년간 하게 될 거야 20년!” (1:51:32) - B를 통해보면 초반부에 버즐리와 같은 슈타지 대학의 친구관계이지만 그루비츠가 비즐러를 교수직까지 올려줬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비즐러의 감싸안기로 자신의 업적에 타격을 입자 바로 보복해 버리는 냉혹한 상격을 보여준다.

3. 영화 주요장면 정리
1) 연극 내용 => “이봐, 무슨 일이야? 새로운 얼굴이라도 본거야? 말 좀 해봐, 마르타! 제발!” “네 아르투어...” “…….더 이상 살아있지 않아. 아르투어가? 혹시 이번엔……. 잘못 본거 아니야?” “아니, 친구..내 말을 믿어. 그는 이미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졌어. 커다랗고 강력한 바퀴가 그를 으깨버렸지.. 난 보여.. ...모든 끔찍한 광경들이.. 왜 내게 환영을 보는 불행한 일이 생겼을까?” “엘레나, 집에 가거라…….가서…….” (7:10) - 처음에 정식 국문 자막을 봤을 때는 브레히트의 ‘도살장의 성 요한나’ 에서 공장주에게 착취하는 부분의 장면이 아닐까라고 생각했는데 지금 여기 네티즌 자막의 경우 베를린 장벽전의 동독에서 일어난 ‘6월 봉기’ 또는 ‘프라하의 봄’을 떠올린다. 전자는 사회주의 안에서 모순된 계급을 나타내고 후자는 자유에 대한 열망을 표현한다. 이는 당연히 동독정부에서 좋아 할리 없을 것이다.
2) “마이네케 부인, 잠깐만 와보시겠어요?” “넥타이 좀 매주실래요? 평생 감사하면서 살게요 괜찮으세요?” “네, 그럼요” “다 됐어요? 멋져요! 완벽해요, 조금만 자연스럽게 해야겠네요. 비밀 지켜주실 거죠? 우리 둘만의 비밀입니다.” (27:14) - 이웃 간에 서로 친근한 모습이 아닌 한쪽은 긴장 속에서 그에게 도움을 준다. 이는 동독이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모습에서 진정한 삶이 아닌 상호 감시의 삶을 강조하는 것 같다. 그리고 긴장 속에서 둘만의 비밀보다 더 큰 비밀로 이를 강화 시킨다.
3) “이 사람들은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군. 이 상황에서 우리가 뭘 하겠어요? 사람들은 모든 것에 익숙해져요 그래, 예전엔 참지 못하던 것도 결국 다 받아들이지 이젠 아무도 변화를 기대하지 않아 (30:00) - 사람들이 분명 뭐가 잘못되어 있는지 알고 있는데 자신의 안위를 위해 싸우지 않는 위선적인 모습에 비판한다. 이 장면의 상황을 짐작하건데 이미 사회주의 속에 계급은 분화되었으며 그 중 남부럽지 않게 사는 자본주의 계급으로 따지면 쁘띠 브루주아에 속하지 않나 생각 된다.
4) “저기 앉고 싶네만..” “사회주의는 우리가 어디 앉아서 먹든 신경 쓰지 않을 걸세” (34:27) - 따지고 보면 사회주의도 그렇지만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이다. 아마 영화감독이 친구 그루비츠의 권위적 행동과 비교하기위해 일부러 대사에 집어넣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5) “어젯밤 드라이만 부인을 집까지 태워다준 차는 장관의 차야 아직 자세히는 모르네만……. 지난번에 장관과 얘기했을 때 부인하지는 않더군. 장관과 드라이만 부인 사이의 일은 기록하지 말고 내게 말하게 자네가 듣는 것에 내 미래와 자네의 미래가 달렸어” (34:56) - 철저하게 상대방의 약점을 캐내기 위해 감시한다 하더라도 이렇게 정작 정부의 약점은 은폐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6) “가지 말아요. “안 돼요 다른 손님이 있어요. 전 예약 손님만 받아요. “벌써 1시 30인데 이 시간에 무슨 손님이오?” “당신은 몰라도 돼요 다음엔 한 시간 더 예약하세요. 잘 있어요.” (46:30) - 버즐리는 타인의 삶속에 빠져 들었지만 한 가지 부족한 게 드라이만과 크리스티아의 관계를 자신은 가지지 못한다는 것이다. 장관처럼 지위를 이용해 만족할 수도 없다. 따라서 그는 다른 방법을 선택하는데 그에게 아쉬운 것은 짧은 순간의 황홀함 그뿐이었지 그가 진정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그가 바라던 것은 육체적인것이아니라 정신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7) 브레히트의 시 => 푸르른 9월 어느 날 어린 자두나무 아래서 나는 그녀를, 그 고요하고 창백한 사랑을 조용히 품에 안았네. 마치 부드러운 꿈인 듯 했네. 우리 머리 위 아름다운 여름 하늘에는 구름 한 점 떠 있었네. 그 구름을 나는 오래 쳐다보았네. 아주 하얗고 엄청 높은 곳에 있던 구름. 내가 다시 올려 보았을 땐 사라지고 없었네. (48:57) - 이미 브레히트 시라고 언급을 영화에서는 했다. 이 시의 제목은 브레히트의 ‘마리에 대한 기억’ 이다. 이 시는 3연으로 그와 절친한 친구이면 동독 유명 음악가인 한스 아이슬러에 의해 노래 부르기도 했다. 영화에서 나온 것은 1연이며 번역은 A같은 경우 영화에 맞춰서 ‘희망’ 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 같고 B의 경우는 브레히트 작품을 많이 번역하는 한마당 출판사의 살아남은 자의 슬픔에 나와 있는 것을 그대로 옮긴 것으로 짐작된다. 이를 비추어 보아 B의 번역자는 브레히트에 대해 공부를 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의 주요 제재는 ‘구름’이다. 아주 하얀 구름은 순수를 상징할 것이다. 이는 브레히트의 ‘한밤의 북소리’에서 ‘하얀 침대’와 비교한다면 쉽게 연관 지을 수 있겠다. 그리고 엄청 높은 곳에 있던 구름은 높은 곳에 있다는 것을 유추해 볼 때 어떤 절대성을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올려다보았을 때 구름은 이미 없었으므로 허망을 상징한다. 따라서 사랑은 순수하고 절대적이었으며 허망했다는 말이 된다. 이는 동독체제 안에서 살아가는 어느 한 삶을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된다. 사회주의의 이념하게 순수하게 시작된 것이 관료체제하의 절대적이 동독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체제의 모순 속에 붕괴되는 허망한 동독을 상징된다.
8) “Ich muß immer daran denken, was Lenin von der Appassionata gesagt hat Ich kann sie nicht horen, sonst bringe ich die Revolution nicht zu Ende Kann jemand, der diese Musik gehört hat, wirklich gehort hat, noch ein schlechter Mensch sein?” (나는 레닌이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열정'을 두고 한 말을 늘 곱씹어야 했어. "나는 '열정'을 들을 수가 없다. 그 곡을 들으면 나는 혁명을 끝까지 완수할 수가 없을 것이다) (51:54) - 여기에 나오는 레닌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수 없는데 레닌이 가장 좋아한 음악중에 하나인 베토벤의 소나타는 어릴 적부터 심취해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좋아하는 그가 예술 때문에 혁명까지 포기 할뻔했다는 그의 말을 통해 예술이 세상을 흔드는 인간조차 흔들 수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든다. 이 장면을 통해 예술과 드라이만과 크리스티아 그리고 버즐 리가 하나가 됨을 볼 수 있다. ‘착한사람의 소나타’ 는 브레히트의 ‘사천의 선인’을 떠올리는데 그 내용처럼 착한사람이 살수 없는 세상을 동독에 그린 것이다. 그런데 예술로서 착한 사람이 살수 없는 세상의 지휘자중의 하나인 신념이 강한 버즐리를 착한사람으로 변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
9) “Du bist aber kein schlimmer Mann.” (근데 아저씨는 나쁜 사람이 아니네요) (53:25) - 삭제 장면이다. 이 말은 아이와 버즐리가 엘리베이터에서 만나고 마지막에 헤어지기 전에 이야기 하는 장면이다. 아이의 순수한 눈에 그는 선한 사람인 것이다.
10) “뭐 들으세요? 무지 집중하시네요 제 차례에요 요원님이 연장근무 하시면 제가 욕을 먹어요 어디 가세요?” “옛날 동창 만나러“ (57:12) - 비즐러가 크리스티아가 사용하는 변명을 따라 사용한다. 이미 자신의 삶속에 타인의 삶이 녹아들어 갔음을 의미한다.
11) “우리 아는 사이인가요? 당신은 절 모르지만 전 당신을 잘 압니다. 사람들은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진짜니까요 배우는 진짜가 아니에요 하지만 당신은 진짜에요 당신을 무대에서 봤어요. 당신 자신의 모습 그대로였죠. 지금 당신처럼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당신이 알아요? 난 당신의 관객이에요 이만 가봐야겠어요 어디 가십니까? 옛날 동창을 만나러요 그래요? 거짓말할 땐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군요 그래요? 네 제가 아직도 당신이 아는 크리스타-마리아 질란드일까요? 당신이라면 당신 목숨보다도 중요한 사람을 떠나겠어요? 예술을 위해 몸을 버리겠어요? 예술을 위해 몸을 버려요? 별로 좋은 거래는 아니군요 당신은 최고의 배우에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까? 당신은 정말 좋은 사람이군요” (59:43) - 비즐러와 크리스티아와의 첫 만남이다. 비즐러가 크리스티아의 삶을 지켜만 보다가 드디어 삶에 개입하려고 시도하는 모습이다. 그녀의 삶과 자신의 삶이 이제는 상호 교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2) “프랭크 삼촌한테 부탁하면 돼, 이번 주 토요일에 서독에서 방문차 오실 거야 금색의 메르세데스 신차로 말일 세” (1:08:59) - 서독의 경제 상황을 보여준다. 동독보다 서독이 경제적인 면에서 앞섬을 과장적인 표현을 통해 보여준다.
13) “아직도 문제가 있으면 일시적으로 교회를 폐쇄해 신부를 구속하면 되지 당장해. 나한테 일일이 가르쳐달라고 하지 말고” (1:17:45) - 에리히 뢰스트의 ‘니콜라이 교회’ 가 생각 난다. 동독의 특징 중에 하나가 교회 만큼은 감시는 하더라도 방해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 당시 통일 되기 몇 년 남지 않은 상황과 그 당시 자유에 대한 동독 인민들의 갈망 그리고 교회에서의 자유를 위한 집회 까지 생각해 볼 수 있는 장면이다.
14) “소지품은 돌려드리겠습니다, 무척 피곤하시겠군요 이건 조국을 위해 봉사한 댓가입니다” (1:44:04) - 조국을 위한 대가로 피임약을 받았다. 물론 원래 주인에게 돌려 준것 이지만 체제하에서 물건은 모두의 것이다. 따라서 그루비츠의 말이 맞다. 그런데 체제 때문에 고통 받아 피임약 까지 먹어야할 처지인데 약을 주면 이건 병주고 약주고인 셈이다.
15) “이게 뭐야? 판자가 흔들리는 것 같군 이 밑에 숨겨놓은 거라도 있소? 힘 좀 줘야겠군 거짓말쟁이 같은 년!” (1:48:17) - 긴박한 상황을 그려 냈다. 하지만 여기서 타자기 없어짐을 통해 다음 뒷이야기에 대한 관객들의 기대와 긴장감을 유발시키는 작용을 했다. 그리고 내용 전개가 갑자기 빨라짐을 느낄 수 있다.
16) 연극 내용 => “애인이 죽었어 애인이? 오늘 아침에 활기로 가득찬 그를 봤는걸 아니야, 내 말 믿어 그는 죽었어, 죽었다는 걸 난 알아 태양이 막 떠올라 그의 얼굴을 비췄지 그의 얼굴에 깊은 공포가 드리워져 있었어, 난 봤어 그 무서운 사랑을... 왜 사랑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느껴졌을까? 엘레나, 집에 가자 난 모든 걸 바꾸고 싶어” (1:53:53) - B 대본의 경우 초반부 연극 장면과 비슷하다. 다만 차이점은 영화에서 클로즈업 한 것처럼 드라이만 옆에나 무대나 크리스티아가 없다는 것이다.
17) “뭔가가 떠오르나보지? 나도 같은 이유로 나왔소 어떤가? 이젠 뭐든 당신 맘대로 쓸 수 있잖소 이게 당신이 꿈꾸던 나라 아니었소? 하지만, 이 연방 독일이 진정으로 예술가들이 원했던 거요? 더 쓸 게 남아 있소? 사람들에겐 더 이상 믿음도 없고 사랑도 없소 여긴 진정한 자유가 있는 연방공화국인데 말이” (1:55:04) - 전 장관이나 드라이만이나 크리스티아라는 인물을 사랑했다. 그는 동독의 진주였다. 동독 인민들의 꽃인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드라이만도 크리스티아의 사랑 속에서 작가의 열정을 키워나갔다. 따라서 이를 감시 속에 잘 알고 있는 장관이 한 말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18) “Nein……. es ist für mich” (아니요... 이 책은 나를 위한 겁니다.) (2:06:32) - 마지막 장면이다. 주인공의 표정에서 소리 없는 감동의 눈물이 흐르고 있는 듯 하다 느낌을 준다. 이는 관객에게도 전달된다. 결국 마지막마저 예술로서 관객마저 주인공과 함께 하나 됨을 느낄 수 있다.

4. 영화를 통한 당시 동독상황
1) “도청은 대부분의 모든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5:22) “상상력을 동원해보시오, 당신 성생활까지도 모든 걸 말이오 당신의 상상 이상이라오, 예술가 양반” (1:56:01) - 동독은 인민들을 감시하여 체제를 유지시키려 한다. 따라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인민을 의심하고 분석하는 것이며 이를 우해 도청까지 사용하여 사생활까지 감시하는 모습을 보인다.
2) “마이네케 부인, 입이라도 벙긋하면 평생 가족을 못 보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까?” (21:43) “크리스타도 알아? 아니 좋아, 내가 도와주지 하지만 그녀에겐 아무 말 말게 뭐? 게오르그, 그녀의 안전을 위해서야” (1:04:58) - 같은 이웃 심지어 가족까지도 의심해야하는 동독 체제를 보여주고 있다.
3) “슈바이버, 정말 미안하네, 내 친구가 좀 취했어 대체 왜 그래? 그가 안보부를 위해 일하는 걸 모르겠어?” (30:48) - B에 언급된 내용을 유추해 보면 슈바이버라는 인물은 알버트의 작품을 훔치고 동독작가를 감시하는 인물을 나타낸다. 따라서 하우저가 슈바이버에게 제체 비난 이야기를 꺼내려 하자 드라이만이 말린 것이다.
4) “호네커와 전화기사이에 차이점이 뭘까?? 없어. 수화기를 내려놓고 다시 걸면 돼..” (97:52) - A의 경우 무슨 말 하는 지 알 수 없는 번역이다. B 같은 경우 위와 같이 동독 최고 지위자인 호네커와 전화기사와의 비유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수화기의 의미는 뭘까? 상황을 비교해 볼 때 바로 지위라고 생각한다. 즉 좌천시키고 다른 사람을 임명시키면 된다는 말이다. 참고로 B를 제작한 사람은 교수형을 뜻한다고 자막에 ()로 올려놨었다. 이 장면을 통해 스탈린주의체제가 내부적으로 이미 무너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5) “정말 국가안보부에서 일하세요?” “국가안보부가 뭐하는 곳인지 아니?” “네. 나쁜 놈들이에요, 우리 아빠를 잡아갔어요” “그래? 이름이...?” “무슨 이름이요? 네 공 말이다, 네 공의 이름이 뭐니?” “아저씨 이상해요, 왜 공에 이름을 붙여요?” (52:35) - 체제에 완벽히 적응한 자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이와 밀폐된 공간에서 만난 모습이다. 여기서 버즐리의 영화 전체적인 변화 모습을 함축적으로 볼 수 있다. 아이의 아버지를 잡아가는 국가공안국 직원이 아이를 만나게 되고 아이는 그의 마음을 건들게 되고 자기도 모르게 심문하려던 그는 다시 마음이 바뀌어 쓸데없는 공 이름이 뭐냐고 물어본다. 여기서 공을 예술이라고 생각한다면 쉽게 이해 할 수 있다.
6) “정부는 모든 사람의 일거수일투족을 주시하고 있다 일인당 평균 매년 2.3 켤레의 신발을 사고 3.2권의 책을 읽는다 매년 6,743명의 학생들이 올A로 졸업한다 하지만 공개되지 않는 단 하나의 통계가 있다 그건 아마도 자연사로 합산되어 발표될 것이다 국가안보부에 전화를 걸어 물어보라 서독과 비교하여 얼마나 많은 용의자들이 자살을 했는지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당신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적을 것이다 이것이 모두 국가의 안전을 위해서다 그렇게 죽은 사람들 모두가 국가의 안전과 안녕을 위한 것이다 독일민주공화국은 1977년 이후로 자살자의 통계를 내지 않고 있다 알다시피 자살은... 이미 최선을 위한 것이다 그들은 피 흘리지 않는, 열정이 없는 삶을 참지 못했기 때문이다 죽음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9년 전, 자살통계를 중단한 후, 유럽에서 동독보다 사망률이 높은 나라는 단 하나 헝가리이다 우리는 모두 사회주의라는같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 사람들 중에서 가장 저명한 사람은 휼륭한 연출가 예르스카이다 (1:05:06)“ - 동독정부 비판 기사이다. 이처럼 동독 인민의 사소한 개개인 일상마저도 다 조사하면서 자살자 숫자를 속이는 모습을 비판한 대사다.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할 점은 엘리트와 사상이 강한자 를 제외한 나머지의 인민들이 자본주의의 경쟁체제의 시민 아니면 이보다 못사는 나라보다 행복도가 낮느냐 라는 문제를 짚어 봐야한다. 먹을 것과 재워줄 것, 입을 것을 다 제공해 주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체제에 도피하려고 최후의 수단을 자살로 선택하는 모습은 한번 생각해 보아야할 문제다.
7) 영화장면 => 소비예트 공산당 신임 당서기장에 미하일 S. 고르바초프 선출 (Neuer Generalsekretär der KPdSU gewählt : Michail S. Gorbatschow) (1:52:35) - 그루비츠가 던져준 신문은 소련의 붕괴와 독일 통일을 암시하게 만드는 복선을 띈다.
8) “여기는 축제의 현장입니다, 젊은이들이 장벽으로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환호하고 포옹을 하고 있습니다, 지금 베를린에서 보도를 하고 있다는 게 믿기지가 않습니다, 1989년 11월 9일,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날입니다 생방송으로 전해드리고 있습니다 (1:52:43)” - 독일이 통일되었음을 보여준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슈타치 직원들이 차례대로 일어서고 문밖으로 걸어 나가는 모습인데 그들도 베를린 장벽을 넘어 통일이 되기를 바랐던 것을 의미한다.

5. 맺음말
영화 전반에 대한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인터넷 블로그에 독일에 사시는 분께서 독일에 있는 극장에서 ‘타인의 삶’을 보고 다시 인터넷에 떠도는 영화 파일을 다운 받아 봤을 때 편집을 너무 많이 했고 오역도 너무 많다고 비평한 글이 있었다. 그분의 리뷰를 보고 나서 여태껏 만들어온 나의 노력이 한순간 수포로 돌아간 것 같았고 특히 발제문 3번의 영화 주요장면 정리 같은 경우는 다시하기 위해 영화를 다시 봤다. 주로 편집하고 오역한 이유가 자막, 장면을 보고 이해하기 힘든 경우 가위질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분의 말씀으로는 2003년 개봉한 독일영화인 ‘굿바이 레닌’도 마찬가지라고 하니 독일영화를 자막에 의존하는 필자로서는 아쉬울 따름이다. 거기다가 우리나라의 잘나간다는 영화 리뷰어 조차도 우리나라의 국문자막과 편집된 것을 보고 리뷰를 썼다면 정말 그야말로 감독이 원하는 작가가 원하는 시각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영화를 왜곡시켜버리지 않나하는 생각도 해본다. 이 발제문을 제출하기 이튿날 저녁에 필자는 우연히 위의 상황에 불만을 가진 네티즌이 오역부분을 뜯어 고친 자막을 구했다. 그리고 처음 영화를 본 순간 첫 번째 자막부터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정식 수입 국문 번역 대부분이 오역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발제를 다시 처음부터 할까 고민하다 교수님께 전화 하여 영화의 큰 흐름을 받지 않는 다고 말씀하셔서 결국 필자는 미리 정식 수입 국문 번역으로 분석한 글을 통해 이해 할 수 없는 부분만 네티즌의 직역 번역을 참고 해서 분석했다. 참고로 네티즌 직역 번역을 보면 이 글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있었다. 사실 완성을 하고 나서 교수님과 통화중에 가장 뇌리에 남는 것은 ‘에덴의 기술자’ 부분인데 네티즌 자막에 스탈린의 ‘황혼의 기술자’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비교 질문했더니 교수님께서 전자가 맞다고 하시자 또다시 어느 자막이 맞느냐에 갈등을 했다. 결국 이 모든 잘못은 필자가 독일 영화 원어를 듣지 못하는 능력 부족 탓이 아닌가 하는 자책을 한다. 마르틴 발저의 ‘어느 비평가의 죽음’에서 평가하는 사람에 따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게 달라지고 이는 판매량에서도 달라짐을 보여준다. 이와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뿐이지 멀쩡한 영화에서 관객이 이해하는 데 믿을 것이라고는 자막과 리뷰인데 다 왜곡 되어 있으면 관객들은 그야 말로 낚시꾼에게 진실을 낚인 거나 다름없다. 이번 발제문을 통해 영화에 대한 주관적인 감상보다 비판에 대한 글이 많아져 버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발제문은 쓰는 형식은 예전에 브레히트 작품들을 발표할 때 사용했던 방식으로 했는데 텍스트위주로 하다 보니 음악과 장면 부분에 대한 분석을 소홀이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또한 다시 검토해 봤을 때 산만한 구성 방식이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들어 평소 실력의 발제문 작성을 하지 못한 거 같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그러고 있지만 발표를 하면서 그 교수님이 계속 나에게 시키시는 것은 내가 아직 많이 부족해서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보며 다음에 잘해보라는 따끔한 채찍이 아닌가 하는 생각해본다.
영화 ‘타인의 삶’을 보면서 주인공과 브레히트가 계속 교차되었다. 주인공이 시인이면서 극작가로 지낸 모습과 그도 사회주의 사상의 충실한 인물이었으나 정작 동독에서는 희극 작품을 많이 쓰지도 않았고 당에 비난만 받은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가 자꾸 브레히트와 연관 짓게 만드는 것 같았다. 최근에 필자는 금강산 통일 기행에 갔다 왔는데 북측 안내원이 항상 2명씩 붙어 다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비록 우리나라 공무원급의 연봉을 받고 주체사상도 강하지만 2명씩 붙게 하여 사상에 흔들리지 않게 하려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처럼 사회주의사상은 체제가 불완전 한 것인지 원래 모순적인지는 몰라도 항상 자본주의사상에 흔들리지 않게 하기위해 끊임없는 감시를 해야 한다는 것은 서로가 결국 불안한 삶속에 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처럼 영화에서도 서로의 이웃, 가족마저 긴장관계 속에서 사는 삶이 진정한 유토피아인지 생각해 본다. 금강산 통일기행 2박 3일 일정동안 북한군인과 주민들 마을 속의 한가운데서 있는 동안 우리도 갇혀있고 답답한 마음을 느낄 수 있었고 안내원들 중 직위가 높은 사람들과 정상에서 웃으면서 이야기 하면서도 말을 잘못할까바 긴장하면서 이야기 한 것을 생각하면 영화처럼 동독에 사는 주인공들의 삶에 대해 몸소 느낄 수 있었다. 이 영화에서는 이 처럼 모두가 평등하다고 믿었던 사회주의사상이 평등 속에서의 정치적 엘리트화로 인한 계급발생과 유물론에 따른 인민이 이런 이론에 의한 체제 모순을 낳는 점을 잘 보여 주었고 이를 유지하기위해 서로를 감시할 수밖에 없는 삶을 잘 보여주었다. 또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점은 주인공들 관계와 예술이다. 이미 위에서 언급했지만 이 영화는 예술로서 사건이 시작되고 전환점을 만들어 내며 끝을 맺는다. 이를 통해 예술 속에서 인간의 변화를 볼 수 있다. 냉혹한 인간 비즐러가 어느 한 예술 연기자를 사랑하고 예술가에 대해 동경을 하는 모습을 통해 알 수 있다. 레닌마저 러시아 혁명을 완수 하지 못하게 할 뻔했던 예술.. 그 예술이야말로 브레히트의 학습극에 의도처럼 모든 세상을 변혁시킬 수 있는 하나의 희망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해본다.

*참고 문헌*

기이한 우정의 연대기 : 김혜리 : 씨네 21
두산백과사전
브레히트 시의 이해 : 박찬일 : 연세대학교 출판부
살아남은 자의 추억 : 브레히트 : 한마당
위키피디아 : 우리들의 백과사전
타인의 삶 : 백준모 : DVD 칼럼리스트 리뷰

함부러 불펌하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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