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기술복제시대를 ‘아우라 상실’과 연관 지어 설명하시오.
기술복제시대의 ‘아우라의 상실’과 예술기능의 변화
모더니티에 대한 벤야민의 분석은 도시의 거리와 대중들에서부터 예술의 영역에까지 나아간다. 그는 상품 물신과 현대 문화 생활간의 관계, 그리고 물질적 생산행위 개념의 예술 및 문화 영역으로 확대를 시도한다. 특히 기술복제와 관련한 ‘아우라’의 상실문제는 벤야민에게 있어 하나의 비극적 사건인 동시에 또 다른 민주적 가능성을 암시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벤야민은 19세기 예술의 변화를 테크놀로지와 예술의 조우라는 계기에 주목하며, 그것이 기반한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이라는 토대 위에서 고찰한다. 생산력의 급속한 발전과 새로운 테크놀로지의 대두는 매체를 변화시켰고, 이는 인간의 지각작용의 조직화 유형과 방법의 전환을 가져왔으며, 결국 지각의 대상들과 인간의 관계를 변형시켰다. 이러한 변화 과정은 예술과 테크놀로지의 관계에서 역시 동일하게 진행되었다. 벤야민은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에서 이와 같은 예술의 변화를 논의한다.
19세기 테크놀로지 발전에 따른 예술의 변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것은 이미지의 대량 복제가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이는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던 유일무이한 현존성, 다시 말해 예술작품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 예술작품이 지니는 일회적 현존성의 상실을 의미한다. 예술작품의 일회적 현존성은 그것의 역사성을 결정하고, 시간의 경과와 함께 그것의 물리적 구조의 변화와 소유관계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도록 한다. 즉, 원작의 시간적·공간적 현존성은 원작의 진품성이라는 개념의 내용을 이룬다. 따라서 진품성의 모든 영역은 기술적인 복제 가능성을 배제한다. 그러나 기술적 복제에 대해서는 그렇게 완전한 권위를 유지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첫째, 기술적 복제는 원작에 대해서 수공적 복제보다 더 큰 독자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진은 원작의 의도를 두드러지게 포착할 수 있으며, 이미지를 고정시킬 수도 있다. 둘째, 기술적 복제는 원작이 포착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원작의 모상을 가져다놓을 수 있다. 기술적 복제는 사진이나 음반의 형태를 통해 원작의 모상에 가까이 갈 수 있는 것이다. 발터 벤야민, 반성완 편역,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발터 벤야민의 문예이론』, 민음사, 2000, pp. 200~201. 그러나 비록 기술복제가 예술작품의 존속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예술작품의 시간적·공간적 현존성에는 손상을 입히기 마련이다. 사물의 역사적인 증언적 가치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기술복제를 통한 예술작품은 그 작품의 유일무이한 현존성, 즉 아우라(Aura)를 상실케 한다.
아우라는 “아주 가까이 있더라도 어떤 먼 것의 일회적 나타남” 위의 글, p. 204.이다. 그것은 예술작품에서 개성을 구성하는 계기로, 예술작품이 지니고 있는 미묘하고도 개성적이며 고유한 본질 같은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예술작품의 전통에서 유래하며, 예술작품의 품위와 자율성을 보증한다. 아우라는 종교적 제의, 마술적 의식과 관련한 미묘하고도 마술적인 분위기이다. 그렇다면, 아우라의 상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우라는 경험과 기억의 측면에서 무의지적 기억에 자리잡고 있는 어떤 지각대상의 주위에 몰려드는 연상작용이다. 그러나 기술복제 시대에 경험과 종합적 기억은 위축되고 있으며, 그 위축은 또 다시 아우라의 붕괴를 촉진한다. 이는 과거를 현재화하는 기억의 상실을 의미하며, 전통과의 단절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아우라의 상실은 벤야민에게 복합적인 경험으로 나타난다. 아우라의 상실은 작품의 제의적인 가치로 인해 생겨난 거리감을 파괴하며, 작품을 관찰하는 자아의 한 상대편으로 나타나게 한다. 이제 인간은 자유롭고 상식적인 의미에서 인간적으로 깨달을 수 있게 되며, 이는 억제된 것의 해방을 의미한다. 즉, 아우라의 상실은 모든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되고 통용되는 가장 범속한 의미에서 외면적이고 공공적인 것의 성격을 지닌다.
한편, 이러한 아우라의 변화는 예술작품에 대한 수용방식을 변화시킨다. 벤야민은 예술작품의 의식가치와 전시가치를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예술이 보여진다는 사실보다는 그것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중요했던 시기, 즉 예술이 종교 의식적 토대에 기반 했을 시기에 예술은 의식가치에 의해 평가되었다. 그러나 여러 예술활동이 종교의식의 모태에서 해방됨에 따라 예술활동의 생산품이 전시되어질 기회는 날이 갈수록 많아지고, 이에 예술작품에 대한 체험양태는 감상과 비평의 분리로 나아가게 되었다. 즉, 의식적 측면이 사라지고 작품과의 거리를 둔 채 비평하는 식의 경험만이 남게 되었다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비평의 경험은 수용자 각자의 실천적 행위의 가능성을 부각시킨다. 대중예술품은 작품과 독자 사이의 다양한 관계를 허용하고, 그들의 독자적인 해석의 여지를 개방한다는 것이다.
요컨대, 기술복제는 예술 작품의 감상과 수용, 가치 평가에 변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를 정리하자면, 위의 책, p. 87. 첫째 예술작품의 기술 복제는 예술작품의 존속 자체를 침해하고 있지는 않지만 예술 작품의 ‘여기’와 ‘지금’, 즉 오리지널 진가의 중요성을 변환시키고 있다. 둘째, 사물의 역사적 신빙성이 흔들리고 있다. 셋째, 기술복제 가능성은 복제된 재생산품을 전통의 영역에서 떼어내고 있다. 넷째, 기술복제의 다양화를 통해서 예술작품의 일회적인 출현 대신에 대량적인 출현이 대두된다. 다섯째, 기술복제는 수용자에게 포괄적인 상황에서 호응을 전달하면서 오히려 복제된 것을 적극화시킨다. 여섯째, 예술작품의 기능변화를 초래한다. 그것은 예술의 정치화를 의미한다. 아우라의 붕괴는 유일성의 극복, 사물들을 사람들에게 더욱더 가까이 접근시키려는 욕망, 일시성 등에 의해 특징 지워진다. 따라서 아우라의 붕괴는 문화적인 것과 사회적인 것 사이의 구별을 모호하게 만든다.
족보입니다~~ 불펌마세요~~ 걸리면 책임 못짐~~
2009년 7월 5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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