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7일 화요일

낭만시 강의 노트

Augustan

1770년 잉글랜드 북서부 호수지방에서 영국 낭만주의의 아버지 란 칭호를 부여받게 될 William Wordsworth가 태어났을 때 영국시는 이미 근본적 변화의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Alexander Pope, Honathan Swift, Samuel Johnson 등 이른바 오거스턴 시대 문인들의 미학은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 일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세련된 지성, 엄격하게 훈련된 장인정신, 독서대중을 계몽해야 하는 당위성에의 집착 등 신고전주의 미학의 핵심을 이루는 전범들은 1770년대로 접어 들자 현실과는 동떨어진 진부한 것으로 여겨지기 시작한다.
Pope 시대에 시란 무엇보다도 현실의 관시마를 잘 반영하는 사회적 성격의 예술이어야 했다. 시인은 시적인 정감을 서정적으로 토로한다거나 친숙한 경험을 고백조로 두서없이 나열하는 것을 피했다. 대신에 명증성, 균형미, 조화가 구현된 언어예술을 창출함으로써 기독교 문명과 고전 문화의 전통적 가치들을 결정화 하는데 목표를 두어야 했다.
18세기 시인들은 서구 문화의 축적된 지혜와 거기에서 샘솟는 영적 전통이 건재하다는 신념하에 스스로를 그러한 전통의 수호자이자 계승자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리스, 로마 현인들의 정전이나 기독교 정전에 명문화된 문화적 이상과 도덕적 기준에 비추어 개인과 사회의 결점과 위선과 특이한 성벽들을 돋을 새김하듯 선명하게 부각시켜 보여줌으로써 인간을 교화하고 더구 더 개명된 사회를 건설하려하였다. Pope, Swift, Johnson 모두가 고정된 위계적 가치체계와 사회질서를 고수하며 그러한 가치체계의 보루 위에서 자기시대 인간의 우매와 사회적 부패를 향해 공격의 화살을 퍼붓는다. 풍자가 그 시대의 대표적 문학 장르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상황논리가 지배했기 때문이다. 오거스턴 시대에 시란 외로운 인간이 삶의 질을 드높이는 데 관심이 많았던 세련된 도시인들을 대상으로 그들을 교화, 계몽할 목적으로 행해지는 공적인 발언 이었다.
이러한 공적의 발언을 위해 가장 효과적인것은 연속된 두 개의 시행을 하나의 단위로 묶어 그것을 정교하게 다듬는 이른바 2행짝짓기 방식이었다. 상사, 대비, 대칭 등의 기법에 기대어 2행단위 내에서 하나의 관념을 완결짓고 이어서 다음 2행단위에서 앞의 관념을 누적적으로 발전시ㅣ거나 역전 시키는 방향으로 시상을 전개함으로써 고전적 균형미에 도달하려 하였다. 2행단위의 형식적 균형과 우아한 대칭구도는 반어적 의미를 조성하는 데 효과적이다.
Pope의 The Rape of the Lock 은 위선적인 사회의 저속한 가치들을 익살스럽게 폭로하는 2행단위 형식의 강점을 보여주는 예다. 여기에서는 현상계의 모든 사건과 사물들은 어느 것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 게 없다는 결론을 받아들이게 한다. 2행단위는 경구와 제혜가 담긴 금언을 위해서도 효과적이다.
Johnson 과 Pope는 자기 시대 인간들의 결점과 위선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인간은 교육에 읮ㄴ하기 보다는 오히려 전통과 권위가 담긴 명판금언들을 마음에 새겨 그것을 금과옥조로 떠받을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오거스턴 시대 시인들의 형이상학은 자연법칙에 대한 믿음에 기초를 둔 형이상학이다. 개인 특유의 신조나 숭배의 형식이나 믿음의 다양한 형식들과는 상관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가치체계가 엄연히 존재한다. 그러므로 시인은 단순히 지역적인 것이나 특수한 것 대신에 영속적 타당성을 지닌 해동기준과 문학스타일에 집중해야한다.
오거스턴 풍자문학은 이성에 대한 강한 믿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현재의 상황을 비판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가치체계의 확립이 선결과제로 요구되었다. 풍자시는 특히 사회적 관계에 관심이 많으므로 오거스턴 시의 배경은 주로 도시이며 사회적 실용성 내지는 효용성을 극대화하는데 시의 목표를 두었다. 그들은 사적인 행동이든 공적인 행동이든 그것을 평가함에 있어 언제나 절제와 중용을 최고의 미덕으로 간주하며 가치의 척도로 삼았다.

이성에서 창조의 신비로 콜린스의 저녁송

Pope의 추종자들은 정확성과 심미적 취향이라는 고전적 원리에 충실한 시에서 조차도 그들이 즐겨 사용하는 관용어구와 어법은 격에 맞지 않는 것으로 비쳐지게 된다. 그러나 18세기 중후반 Collins의 Ode to Evening은 달랐다.
Collins의 송시의 톡징을 요약하자면 자연은 신심 깊은영혼의 소유자들이 허망한 욕망의 세계로부터 피신할 수 있는 은둔처이자 자유롭게 예배드릴 수 있는 사원이 된다. 자연은 장식 혹은 배경 역할에서 벗어나 본질적 요소가 되는 것이다. 인간사가 펼쳐지는 낮의 세계가 거부되고 대신에 박명 속에서 흐릿하게 모습을 드러내는 환상과 이상야릇한 기행들이 예찬되고 있다.
시 쓰기의 규칙보다는 창조의 신비에 더욱 더 관심을 갖는 Collins의 태도 변화가 잘 드러나 있다. 삶의 맥박과 씨앗이 시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고요한 예술의 형식으로 변화되어 정지 상태로 이행하는 방식이 탐색되는 것이다. 시적 세련화와 증류화라 할 수 있는 과정은 고요한 휴식의 이미지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난폭한 운동의 이미지들을 통해 암시된다. 이 시는 황혼이 잣는 영묘한 교직으로부터 일련의 유기적인 이미지들을 이끌어내고 그것들을 통해 시적 변환의 과정을 탐색하기 때문이다. 이 시에서 황혼과 한낮의 관계는 예술과 인생의 관계에 대한 은유라 할 수 있다.
이 시는 창조과정과 병행하여 일어나는 영적 변화에 초점이 모아진다. 현실의 불순물이 완전히 제거된 순수 서정시 형식으로의 귀환, 일상적 산문의 범위를 넘어서는 표현적 터치로 인해 신비의 세계에 어울리는 품격 높은 시어, 그러면서도 ㅇㄹ상어의 생동감 넘치는 목소리에 더욱 더 잘 조율된 언어, 깊이를 헤아릴수 없는 신비한 힘들의 모태가 되는 자연, 그리고 그러한 자연 속에서 시인이 빠져드는 깊은 경외감, 시인 자신의 의식을 탐색하고 탐색의 관정이 생생하게 반여오디는 정신적 드라마로서의 시이다.

낭만적 상상력

William Blake는 근대시의 궁핍한 조건을 누구보다도 불만스럽게 생각했던 시인이다. 이 때 낭만시와 긴밀하게 연관된 이른바 유기체론이 태동하고 발전하였다. 이 이론에 의하면 시인의 마음속에 시작 행위를 일깨우는 모종의 충동들이 유기적 통합과정을 거치면서 시 형식으로 태동, 진화되고 최종적인 완결성 또한 갖추게 된다고 했다. 자연 속에는 모든 사물에 생명을 공급하는 신성한 힘이 존재하는 데 이러한 힘의 인간적 발현이 곧 상상력이다.
이는 로크와 데카르트로 이어지는 17~18 세기 계몽철학자들의 합리주의와 경험주의에 대립되는 것으로 주체와 객체를 분리시키는 서구 형이상학의 지적 전통을 거부하는 것이다. 물질적 확장과 과학적 측정의 세계에 지성과 가치를 추출해내는 데카르트나 지각현상에 있어 인간의 마음은 수동적이라고 보는 로크와는 달리 낭만주의자들은 사실의 세계와 환상의 세계, 상상력의 세계와 현상계 상이에 가로놓인 깊은 균열을 메우는 것이 자신들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그들에게 주체와 객체, 인간의 마음과 인식대상은 존재론적 통일체이며 상상력이 의식과 일상적 대상물 사이에 성찬적 다리를 놓을ㄸ 숨겨진 관계를 드러내고 통합의 형식은 더욱 더 선명하게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다.
인식 주체와 인식 대상이 서로 녹아들어 하나된 힘으로 일구어 내는 창조라 할수 있다. 그러므로 낭만주의자들에게 상상력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은 유토피아를 꿈꾸는 한가로운 정신작용이 아닌 서로다른 특성을 갖춘 무수한 개체들이 혼재되어 있는 불연속적 다양성의 세계에서 사물들 간의 친화 관계를 비추는 등불과도 같은 것이 바로 상상력이다.
이에 William Blake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외부세계의 구체적 사물들을 뚫고 들어가 내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능력을 보여준다.

순수와 절대를 향한 갈망

낭만주의자들은 의식을 사로 잡는 것을 어린이들이라고 했다. 어린이는 정신적 영적 전체성의 표상으로 어르들이 세속의 삶과 타협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잃어버리게 마련인 전체성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존재로 간주했다.
하지만 그 당시 영국 전역에서 미성년자의 노동력이 광범위하게 착취당하던 산업혁명 시대에 구성되 었다. College의 Dejection에서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을 형상화하였다.
셸리의 서정시에서는 종결되지 않은 상태로 끝맺음되고 있어 갈망의 대상이 온전히 담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표형했다.

프랑스혁명과 영국 낭만주의

프랑스 혁명은 낭만주의 운동이라 일컬어지는 경향의 정치적 사회적 대응현상으로 이성의 시대 산물인 동시에 그에 반발에서 비롯된 문화 현상이다. 인간의 본성과 사회에 대한 새로운 사상이 사변의 영역을 떠나 역사의 무대로 진입하는 순간 열정과 에너지와 도전과 반역의 시대는 무르익고 오거스턴 종언과 함께 새시대가 출현한다.
루소와 낭만주의자들은 인간의 본성은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이었다. 인간의 잠재력과 가능성이 충분히 발휘되지 못하는 것은 기득권세력이 편향된 사상, 그릇된 이데올로기를 교묘하게 퍼뜨려 인간을 질식 상태로 몰아넣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William Blake의 the Tyger는 혁명의 창조적 에너지를 표상하는 호랑이를 그린다. 영국은 워털루 전쟁 승리로 민주적 개혁사상을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맨체스터 성 베드로 광장 사태 후 셰리는 England 1819를 통해 권세력의 무능과 무책임과 마비된 양심을 공격하였다.
그러나 로비에스피에르 통치하의 대량학살과 나폴레옹 황제즉위후 사회적 외면적 가시적 재편만으로는 어둠의 세력을 몽아낼수 없다고 생각한다.
정치적 격변과 문화적 전환의 시기에 시인들은 시적 표현의 범위를 확장하고 인간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혁명의 시대가 만들어낸 온갖 소음에 시달리면서 의식의 최전선을 오간다. 전통적 ㅅㄴ앙의 보호도 귀족들의 후원도 기대할 수 없었던 그들은 나름대로 예술가의 역할을 재 창안하고 문학의 기능을 재규정해야할 위치에 있었다. 더욱이 그 시대는 혁명 직후 유럽을 재편해야 할 책임을 떠맡은 개화된 정치엘리트들에 의해 시의 가치 자체가 의문시 되기 시작했다. 현대적 산업화, 사회적 유용성, 정치적 실용주의의 세계는 19세기 초반 공고해지고 있었다. 나폴레옹 전쟁 직후 유럽 재건의 책임을 떠맡은 실용주의자들에게는 돈키호테적 발상으로 비쳐진다.

이성에서 감성으로 (감성시인 출현 그레이와 콜린스)

18세기 영국에서는 합리적 회의주의 사상이 인간의 정신활동과 일상 생활 전반을 규정하게 된다. 18세기 서구인들은 자신과 섹{를 더 나은 상태로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개선에 대한 회의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에 체제순응적 보수주의의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합리적 회의주의가 확고하게 유지되는 동안에도 한편에서는 그러한 경향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Thomas Gray, William Collins 는 우수와 환희의 정감을 오가며 다양한 목소리들을 선보였다.
낭만주의자들은 제재를 구하는 데 있어 주변세계보다는 자신의 내면으로 향하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를 탐구하는 일 못지않게 자기 내면의 미묘한 움직임을 탐색하는 것 역시 중요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의 흥미를 유발할 수 있다고 그들은 생각하였다. 인간 능력의 한계를 인정하고 운명을 겸손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던 신고전주의 작가들과는 달리 낭만시인들은 인간의 무한한 가능성을 신뢰했다. 인간의 잠재력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사회악만 제거한다면 건강한 개인, 건강한 공동체를 건설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는 일이라 믿었던 것이다. 그들은 상상력을 절대시하였다. 상상력이라는 조형력을 통해 새로운 인간, 새로운 사회를 건설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게 되자 이들은 인간내면이라는 빛나는 우주를 탐색해나간다.

Thomas Gray의 Elegy Written in a Country Churchyard

시의 첫 행부터 양강 오음보의 단호한 리듬과 함께 단음절어, 장모음, 이중모음 등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조종의 낭랑한 울림이 공명을 일으킨다. 한결같이 이어지는 우수의 분위기는 명상의 대상인 죽음과 잘 어울린다. 사라지는 하루를 슬퍼하는 만종의 여운, 초원을 맴도는 양떼의 무리 하루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농부의 지친 걸음걸이 등이 암시하듯, 이제 시인에게 남겨진 것은 어둠과 죽음에 대한 명상 뿜이다. 그러한 사색에 걸맞게 시의 리듬도 자연과 더불어 사는 시골사람들의 느린 움직임을 재현하려는 듯 완만한 리듬으로 일관한다.
전기 낭만시인들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모습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그것을 바라보며 세밀하게 관찰하는 경향을 보인다. 따라서 자연을 시의 제재로 사용한다는 점에서 Thomas Gray는 동시대 신고전주의 시인들과 편차를 보이지만 밤의 세계에서 동물들의 모습과 동물들이 조성하는 음향을 따라가는 그의 발걸음은 시골 순사의 냉정하고 차분한 걸음걸이 바로 그것이다.
감각에 와 닿는 인상들을 2연에서는 잘 보여준다. 감각에 새겨지고 전달되는 과정에서 시인이 좀처럼 냉정을 잃지 않는다는 점에서 Thomas Gray는 고전적 전통으로부터 크게 이탈하지 않고 있다. 3연에서는 자연의 인간화에 더욱 강화한다. 4~6연에서 조그만 산골마을 촌부들의 죽음이라는 이 시의 주제가 전면에 부각된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6연에 오면 삶의 긍정적 측면을 예찬하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전체적으로 이 시는 도덕적 감화를 주요 목표로 하는 18세기 신고전주의 문학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그는 도시의 부산한 거리와 선술집과 커피하우스를 뒤로하고 전원 속에서 시의 원천과 동력을 찾아 나선다. 그것들은 시인을 소박하면서도 숭엄한 사색과 정감으로 이끈다. 그리고 이 시는 개인의 내면이라는 주체의 영역을 탐색, 발굴하려고 시도한다는 점에서 주요 낭만시인들의 영역에 들어서 있다.

William Collins의 Ode on the Poetical Character

William Collins는 신고전주의 전통을 전적으로 거부하지는 않았으나 오거수턴 주류문학에서 크게 벗어나있다. 그의 마음은 주로 허구의 작용과 함께 공상과 관련된 주제들에 몰입되어 있다. 사색의 몇몇 특이한 습관들에 탐닉함으로써 그는 자연의 범위를 벗어나는 상상력의 비상을 즐긴다. 우리 마음은 민중적 전통에 수동적으로 순응할 때만 그러한 상상력의 비상과 화해할 수 있다. 그는 요정과 수호신과 거인과 괴물들을 사랑했고 마력이 깃든 오솔길을 즐겨 배회했으며 금빛 찬란한 거대한 궁전들을 바라보거나 이상향의 정원 폭포 근처에서 한가로이 지내는 데서 즐거움을 맛보았다. 그가 갈망하는 것이라고는 야성이 깃든 웅장한 자연과 기묘하리만치 풍성한 광경들이었다. 그가 빼어난 형식이라 생각했던 이런 것들은 그를 동양적 허구와 풍유적 심상들로 이끌었다.

William Blake의 신비적 성향과 영국의 사회변동

18세기 후반 영국 사회의 변동도 William Blake의 정신주의적 성향을 강화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한다. 당시 영국사회는 그때까지 가내수공업의 형태로 존속해오던 생산방식이 증기기관의 발명에 히입어 대량생산체제로 바뀌는 급격한 사회변동의 와중에 돌입해 있었다. 베틀 앞에 ㅇㄵ아 손으로 직접 직물을 짜던 시골 아낙네들의 가내수공업적 생산방ㅅㄱ은 대량생산체제가 본격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하면서 경쟁력을 잃게 되고 그 결과 그들은 저임금 공장 노동자로 편입된다. 또한 기술의 발달로 붇를 축적한 부르주아와 지주들은 자영농민들의 농경지를 서서히 잠식하는데그들은 거기에다 울타리를 쳐서 자영농민과 소작 농민들을 도시로 내몰아 공장 노동자로 전락시킨다.
역사상 처음으로 영국에서는 노동력을 수탈당하는 수많은 근로대중이 비좁은 빈민가에 촘촘히 모여 살며 프롤레타리아 계급집단을 형성하게 된다. William Blake는 물질이야말로 영혼을 타락시키는 장본인임을 간파하고는 구약시대의 예언자처럼 영국인의 물질 숭배와 물질만능주의를 준엄하게 비판하기 시작한다.
산업혁명 못지않게 프랑스혁명도 인간의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일깨우고 창조적 정신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킨다. William Blake는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의 이념과 대의에 공감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철회하지 않는다. 프랑스 혁명은 그때까지 억눌려온 인간의 잠재력이 화산이 분출하듯 폭발한 현상이며 자유로운 환경 속ㅇ서 상상력이 거침없이 발현될 때 인간은 냉담과 무관심의 벽을 허물고 공감과 사랑으로 결속된 인간공동체를 유지 및 발전시킬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다.

순수의 세계에서 경험의 세계로 : Holy Thursday

William Blake는 첨예하게 대립되는 인간 영혼의 상반된 두 상태를 명료하게 보여준다. 대부분 한 쌍을 이루면서 전체적으로는 고도의 극적 효과와 함께 폭넓은 상징성에 도달하고 있다. 순수의 노래와 경험의 노래 모두에 Holy Thursday가 있고 순수의 노래에는 The Blossom과 The Lamb 가 있으며 체험의 노래에는 The Sick Rose와 The Tyger가 있다.
Holy Thrusday에서 런던 자선단체들의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자선학교 어린이들이 예수승천을 기념하는 Ascension Day에 세인트 폴 성당에 모여 예배드리는 광경을 지극히 상반된 시각에 보여주고 있다. 자선학교 어린이들은 소속학교에 따라 각기 다른 유니폼을 입고 배정된 구역에 모여앉아 예배를 드리는데 그 광경을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 서로다른 생각과 정서를 유발한다. 부자들의 자선행위는 기본적으로 종교적 또는 인도주의적 측면에서 행해지는 것이지만 산업혁명 당시 부르주아 계급의 기득권 유지 전략으로 자선하교 운영 측면도 있다. 어린이들에게 복종, 헌신과 같은 일부 종교적 교리를 교묘히 주입함으로써 후일 이들이 체제전복 기도레 합류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할 뿐만 아니라 자선학교를 운영하는 이면에는 자신들의 지위를 넘ㅈ보지 않을 정도로만 어린이들을 교육시킴으로서 고분고분한 노동자로 길들이려는 의도가 있다. William Blake는 자선이 행해진다는 사실 자체가 인간이 인간다운 관계를 맺는 데 실패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으로 보는 것이다.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이면에는 인간에 대한 무관심이 깊이 내재되어 있으며 자선행위란 것도 따지고 보면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발현되기 보다는 기득권 수호라는 자기방어 차원에서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경험의 노래에서는 아이들이 부르는 찬송가 소리가 굶주린 아이들의 절규와 흐느낌으로 들리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회의적, 부정적 관점과는 대조적으로 순수의 노래는 화자는 어린이들이 예배드리는 광경에 빨려들어가 그들의 예배의식에 참여한다.
경험의 화자가 산업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깊이 통찰하고 도덕적으로 우월한 것 같지만 그는 구체적인 상황에 대한 공감적 대응 능력을 상실하고 단지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독선적으로 사고를 전개한다고 할 수 있다. 순수의 화자는 감상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으로 비쳐지기도 한다. 하지만 최소한 그는 마음의 문을 열고 현실에 참여하면서 충만한 삶 속에 내재된 신성을 경험한다. 순수의 화자는 그의 눈에 들어오는 인물들의 표정과 걸음걸이, 의상과 노래하는 모습 등 세부적 디테일들을 보이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으로 보아 그 상황에 몰입, 참여하고 있다. 경혐의 화자가 제시하는 상황은 시의 제목을 유추하지 않으면 예배장면을 알 수 없다. 그는 현실의 상황에 공간적으로 동참하는 대신 자신의 고정관념을 거기에 투사하는 측면이 많다.
경험의 노래 화자의 분노와 고발은 체계적인 사유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다분히 일회적이 되어 버릴 공산이 크며 거기에는 사회적 책임감 또한 결여되어 있다. 순수의 노래 화자가 다분히 감상적이고 단순하며 사회 부조리에 둔감한 것처럼 비쳐진지 모르나 최소한 그는 불행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고 그들을 위로하는 자선 행위를 통해 사회적 책임을 다한다. 그는 고정관념이나 이데올로기 또는 독선적인 생각을 타인에게 강요하는 일 없이 매순간 현실의 구체적 상황에 공감하고 참여함으로써 창조적인 삶을 실현한다.
Eternity 는 순수한 영혼과 타락한 영혼의 대립의 상태를 재현한다. 처음 두 행에 재현된 인간은 욕망의 대상에 너무나 집착한 나머지 그것을 영속적으로 완전히 자기만의 것으로 만들려는 이기적인 인간이다. 기쁨의 대상이란 붙잡으려고 ㅏ는 숙간 재빨리 우리의 손아귀를 빠져나가 버리는 존재다.
William Blake의 시에서 인간의 이기심, 불안, 공포, 무관심, 탐욕 등은 경험적 세계의 보편적 속성들로 공감적 경험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무산시킨다.경험의 노래의 화자들은 대부분 자신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현명하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면서 강하게 자기주장을 펴는 자들로 감각의 문을 닫아걸고는 고정관념이나 독선적인 생각 혹은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혀 모든 상황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한다.

Ah sun flower 와 London 타락한 세계의 실상

William Blake의 시를 읽으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신도 왜곡된 삶을 살아왔음을 인식하게 되며 아무 조치 없음애 안타까워하며 허무감 속으로 빠져든다. 경험의 노래 Ah sun flower는 현실을 부정하며 현실에 절망하는 인간의 보편적 상황을 상징적 기법으로 매우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첫행의 아 하는 탄성과 마지막 행의 나의 해바라기란 표현에서 감지하듯이 시인은 해바라기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고 있다. 해바라기는 태양이라는 도달할 길 없는 목표를 갈망하는 일 이외에는 다른 어떤 존재방식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황금의 나라는 죽은 자들이 무덤에서 깨어날 때에야 비로소 다가갈 수 있는 영혼의 궁극적 목적지, 내세의 영역이다. 그들이 현실을 불만족 스럽게 여기며 현실이 제공하는 삶의 다양한 국면을 향유하지 못하는 것은 이상을 죽음의 영역에다 설정하기 때문이다.
그릇된 갈망은 인간의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한다. 해바라기의 잘못된 존재방식은 이 시의 내용뿐 아니라 구문을 통해서도 재현되고 있다. 단일 문장으로 이루어진 이 시에서 주어를 이어받는 술어가 존재하지 않는 다는 사실로 인하여 불만에 찬 인간의 불안정 모습이 부각된다. 술어의 부재로 시의 의미에 적중했다는 느낌을 맛볼수 없고 결과 충족의 결핍에서 비롯된 불안감이 더욱 더 가중된다.
London의 첫 연에서부터 무거운 리듬과 함께 단어의 반복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 있다. 런던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의 행렬은 마치 죽음의 행렬로 느껴진다. 산업혁명의 초기 단계에 진입한 영국사회의 실상을 재현한다. 마그나카르타는 런던의 모든 거리는 소수 특권층 인사들만이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고 서민대중은 특권층의 허락을 받아야만 통행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Charterd는 당시 영국 민중이 겪어야 했던 온갖 부자유와 질식할 듯한 삶의 모습을 재현하는 것이다.
둘째연에서 기들권자들이 만들어 놓은 법과 제도와 관습에 영국 민중이 짓눌린 상황은 단어의 지속적 반복을 통해서 보여준다. 자유의 제한이나 박탈은 다음 연에서 거론되는 교회와 궁전처럼 이라적으로는 외부적 권위로부터 강압적으로 부과되는 것이지만 인간이 두려움에 사로잡힌 나머지 일찌감치 저항을 포기하고 당국의 명령을 내면화하는데 원인이 있다.
기존 제도의 해악이 정치, 사회, 종교의 전 영역에서 조직적으로 이루어지는 현상은 3연에서 더욱 더 구체성을 띠고 전개된다. 당시 런던에서는 굴뚝청소용 긴 빗자루를 사는 것보다 어린이를 고용하여 굴뚝을 청소하게 하는 편이 훨씬 더 경제적이었기에 그들을 굴뚝청소에 광범위하게 이용했다고 하기에 충분하다. 검게 그을려 가는 교회는 산업화사회의 전반적 타락 현상에서 교회도 예외일 수 없음을 암시하고 있다. 국가권력 또한 조국과 민족의 이름으로 민중을 선동하여 드르을 구국의 전쟁터로 이끌지만 그들이 내세우는 대의 명분은 가진자들의 기득권 ㅜ호와 더 많은 부를 획득하기 위한 것일 뿐이다.
이러한 사회는 성의 타락 현상으로 나타난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성을 상품으로 내어 놓은 매춘부의 저주소리를 듣는다. 매춘이 공공연히 행해지는 사회에서 그것은 결혼제도에도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혼은 한 쌍의 나녀가 사랑을 통해 희망찬 미래를 기약하는 제도이지만 인간이 상품처럼 매매되는 경험적 세계에서 그것은 매춘행위나 다를 바 없다. 혼례를 치르기 위해 타고가는 신랑신부의 꽃마차가 어느덧 죽음의 꽃상여로 바뀌는 것은 바로 그이유다.

한층 더 견실한 순수를 향하여

William Blake는 상상력이라는 인간의 창조적 정신 작용을 대안으로 제시하였다. 인간의 상상력을 하느님의 창조력과도 같은 창조적 정신 작용으로 보았다. 불합리한 제도와 관행, 위선과 이기심 같은 비인간적 속성들은 모두가 이성의 산물들이며 사회의 불합리를 이성적으로 비판하면서 점진적으로 개선하려는 18세기 지식인 들의 노력은 악화시킬뿐이다. 점점 삭막해져 가는 세계에서 기존의 정치, 사회, 종교제도에 의지할 수 없게된 인간에게는 인간 본연의 따뜻한 마음 이외에 다른 대안이란 있을 수 없다. Blake에게 상상력이란 인간에게 태생적으로 주어진 순수하고 따뜻한 마음이다. 경험의 세계에 사는 인간은 상상력을 통해 마음의 문을 열고 타인에게로 향할 수 있다. 상반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한 발전이란 있을 수 없다. 끌어당김과 밀어냄, 이성과 에너지 사랑과 증오는 인간존재의 필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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