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생산자로서의 작가’
문학은 일반적으로 경향성 즉 세계관과 질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다. 이는 경향성과 질이 둘 다가 충족적이어야한다. 그러나 단순히 둘다 충족되어야한다는 것은 아니다. 올바른 경향이 뒷받침 될려면 질도 추구되어야한다. 문학과 예술은 질적이어야한다. 하지만 경향성과 질적의 문제를 비평하기가 쉽지 않다. 벤야민은 어떤 문학 작품의 경향은 그것이 문학적으로 올바른 경우에라야만 정치적으로도 올바르다는 점을 든다. 즉 정치적으로 올바른 경향은 어떤 문학적 경향을 내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학적 경향을 내포하기 때문에 문학적 질을 내포한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한 기술이라 개념을 통해 벤야민은 문학적 생산물을 직접적인 사회적 분석과 도 이를 통한 유물론적 분석에로의 접근을 가능케 하는 개념을 거론 했다. 동시에 기술이라는 개념은 형식과 내용의 비생산적 대립이 극복될 수 있는 변증법적인 출발점을 제시하며 기술개념은 질의 관계를 올바르게 규정할 수 있게 하는 지침을 내포하고 있다.
프롤레탈리아와 노동자들간의 계급투쟁에서의 예술 기능은 프롤레탈리아를 지원하고 후원하는 예술가인 정신적 엘리트가 시대의 생산양식에 맞는 기술이 중시된다. 브레히트는 최초의 지식인에게 생산수단을 가능한 시도를 하였는데 개인체험과 작품을 만드는 기술의 혁신을 중요시 했다. 오케스트라 같은 음악은 말이 없는 음악이며 엘리트로서의 음악으로 치부될수 있지만 예술이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한 예술로서 대중을 무시하거나 폄하하는 것이 아닌 음악회를 정치적인 집회로 변혁시킬 수가 있다는 것이다. 예술은 일반 대중에게 영향하여 쉽게 다가갈수 있어야 하지만 질적인 후퇴가 아닌 이 시대의 생산 양식과 맞는 대중의 발전으로서 지향해야한다.
브레히트는 전통적 형식에 엃매이지 않고 장황한 줄거리를 포기하여 기능적 상관관계를 변혁하는데 성공하였다. 재현이 아니라 발견하고 제시하는 것으로써 줄거리의 중단을 요구한다. 이로써 상황은 관객에게 가까이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제시 되게끔 되있다. 그리고 상황의 발견은 줄거리 진행과정의 중단을 통해 이루어 진다. 또한 배우에게는 그의 역할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도록 강요한다. 이로써 깊이 성찰을 요구하게끔하며 다른 생산가에게 지침을 준다. 부르주아와 프롤레탈리아의 대립에 개조, 인식을 심어 줄수있는 태도가 필요하다. 꼭 계급 투쟁 수단으로써 이용해야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회주의 구조에서 문학수용은 유효된다.
불펌하다 걸리지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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