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5일 일요일

독일의 영화 감상평

독일의 영화 감상평


과목 : 독일 문화 1

교수 : 김창우 교수님

2006006015 박형락


다음 글은 독일 영화 감상문이다. 독일 영화 감상 한 것 중 일부는 예전에 감상을 하고 감상평을 작성한 것이 있다. 영화를 감상 하자마자 바로 쓴 영화 감상문이 좋은 감상문일 것 같아 감상문을 다시 새로 쓰지 않고 예전에 작성했던 감상문을 발췌한 글이다.


굿바이 레닌


제목에서 나오는 레닌은 러시아 공산당을 창설해서 국가의 원수이며 혁명의 사상가이고 지도자로서 소련 10월 혁명의 주역이다. 위와 같이 레닌이라는 이름은 공산당 즉 사회주의의 상징적인 존재이기도하다. 그렇기 때문에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 제목 만으로도 사회주의와의 결별이라는 암시를 주고 있기도 하다. 이 영화는 드라마 이자 코미디에 속하는 장르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코미디는 슬픈 코미디를 낳게 되는 심각하면서도 상황을 희화한 영화이다.

이 영화의 발단은 동독에 살고 있는 주인공 가족이 아버지가 서독으로 몰래 떠나자 어머니는 사회주의와 결혼함을 맹세하고 사회주의로서 선봉장 역할을 하다가 주인공이 동독과 서독의 이동금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자 그걸 본 어머니가 심장발작을 일으키며 생사를 오가게 된다. 이 때 독일은 동독과 서독이 통일을 하게 되고 서독에서의 자본주의 물결이 흘러 들어오게되는 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정신적으로 모든 것들이 서구화 된다. 그리고 갑자기 어머니가 깨어나게 되는데 의사가 어머니는 오래살지 못할것이며 충격을 받으면 안된다고 했기 때문에 주인공이 자본주의에 의한 사회주의의 패배한 모습을 보면 충격을 받을 까봐 어머니를 속이려고 엄청난 연극을 벌이게 되는 것이 주된 내용이다.

이 영화는 통일되기 직전부터 통일되기 까지 그리고 그 후를 잘 묘사하고 있다. 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후 자본주의가 서서히 들어오는 동독을 보여준다. 이로 인해 영화에서 나오듯이 경제가 서독보다 동독이 못하기 때문에 동독의 대부분 회사들이 파산을 하였고 이로인해 불과 8년도 안되어 동독의 제품을 찾아 볼수 없게 되고 버거킹, 코카콜라 등 서구화가 급속도로 진행 되었다. 또한 서독과 동독이 경제적으로 큰 차이를 보여왔기 때문에 통일 후 동, 서독이 서로에 대한 선입견이 간혹 영화에서 나타나게 된다. 서독인은 동독인에게 항상 불평불만에 가득차며 게으르다고 생각하고 동독인은 서독인을 햄버거와 뚱뚱한 사람으로써 연상한다. 또한 영화에서 어머니의 교장선생님이 퇴직당한 모습이 있는데 이는 통일후 동독 학교 교사 대부분이 공산주의가 없기 때문에 교사들이 실직을 하게 되고 서독의 시간 강사들이 많이 발령받게 된다. 그리고 통일후 2~3년간은 서독의 실직자들이 대부분 동독으로 가서 결국 동독사람들은 서독인들과 갈등할 수밖에 없으며 오스탈지어를 느끼게 된다. 주인공의 어머니 친구들이 옛날의 향수를 느끼게 되는 모습에서 알수가 있다.

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모습은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자본주의자도 아닌 중립적인 입장에서 놓여진다. 그렇게 때문에 자본주의를 선봉하지만 동독의 향수에 대한 기대도 존재한다. 그리고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의 이상을 어머니에게 비디오로 보여주는 장면에서 드러나게 된다. 주인공의 동생은 통일에 빨리 적응 하는 존재로 나타나게 되는데 버거킹에 취직하고 서독인과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고 패션과 문화도 서구화되는 모습에서 알수 가있다. 그리고 어머니는 동독 체제를 고수하지만 내면상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의 가장 큰 특징은 미묘한 영화 시점 관계이다. 이 영화는 2003년에 나온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영화속에서의 주인공의 방, 즉 주인공이 사는 집 안에는 어두운 누와르풍을 강조하고 밖을 밝게 표현한다는 점에서 주목되는 점이다. 특히 어머니의 방은 영화 대부분 이상하게도 밝은 장면을 넣어놓지 않고 있다. 이 장면은 동독인이 서독으로 도망치기위해 헝가리로 몰래 빠져나가는 과정에서 살아온 헝가리에 있는 집과 비교해 본다면 어두운 동독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는 대부분 3인칭 시점으로 중립적인 카메라의 입장에서 어머니와 관련된 사건이 나오면 즉각 나레이터로 주인공의 내면을 드러내게 함으로써 주인공의 입장을 듣게 한다. 이 점에서 마지막에 주인공은 어머니는 결국 진실을 모른채 죽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미 어머니는 그 전부터 알고 있다는 점에서 어떻게 보면 동독인 가족의 행복한 비극을 보여주는 모습을 영화 전체에 드러내게 된다. 가장 큰 백미는 어머니가 일어나서 밖으로 혼자나가 동독에는 상상조차 힘들었던 중고차 시장과 가구, 서독에서온 많은 사람들과 위성tv 그리고 철거되어 폐기물처리장으로 이동해버리는 사회주의의 상징인 레닌 동상의 모습은 그녀가 레닌동상이 없어질 때 까지 쳐다볼 수밖에 없는 그녀의 어느 깨달음을 알게 해준다. 하지만 여기서는 여러 가지 변명으로 무마시키는 주인공과 동생이 나오지만 주인공 마저 무마할 수 없는 장면이 나온다. 주인공의 아내가 어머니에게 모든 사실을 영화 2~3초 동안 매우 짧게 이야기 하는 장면이 있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분명 믿을 수 없는 표정을 짓지만 결국 한편으로는 수긍하는 모습, 그리고 나중에 주인공이 자신의 이상 즉 아주 조심스럽게 독일 통일 하면서 단순한 자본주의가 순식간에 쓸어가는 동독의 모습이 아닌 서로가 세계평화를 위해 함께 나아가기위한 합의된 통일을 보여주는 것으로 연극을 마치려하는 장면에서 나타냄을 알 수 있다. 또한 어머니는 자식을 위해 동독에 남겨질 수밖에 없었고 당의 비밀경찰 즉 슈타치에게 감시를 받지 않기 위해 당에 협력하게 되는 모습에서 가족의 아픔과 현재 독일 지성인의 동독에 대한 과거 청산 문제와 도덕성 문제를 조심스레 드러내고 있다.

어머니의 우상이 레닌이었다면 주인공의 우상은 지그문트라는 동독인 독일최초 우주비행사였다. 하지만 이 우상들은 무너져 버렸다. 우상이 무너져 버리고 나서의 동독인의 모습을 보여준 영화 ‘굿바이 레닌’은 단지 남의 나라이야기가 아닌 우리나라 이야기라고 생각 된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으로의 갈등과 대립을 잘 표현한 영화는 비록 이에 대한 해결책은 보여주지 못한채 단지 주인공으로서의 이상으로서의 아쉬움으로 남긴채 동독인의 통일에 대한 비극을 잘 보여주고 있다. 하늘이 갈라져 버리고 다시 합쳐질때 주인공은 단지 머무를 수 밖에 없는 존재를 보여준 영화이다.



니콜라이 교회


에릭 뢰스트의 원작을 독일의 WDR, MDR 등 여러 방송사들이 합작하여 TV용으로 제작한 ‘니콜라이 교회‘는 동독의 역사를 바꾸어놓은 월요 데모가 있는 날까지를 다룬다. 영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주인공 가족이 겪는 장면과 다른 하나는 니콜라이 교회를 중심으로 벌이는 반정부 운동이다.

주인공의 가족은 동독의 고위 간부였던 아버지가 죽음 이후 딸 과 아들의 엇갈린 길로 대변된다. 공산주의체제에 대해 염증을 느낀 딸은 우울증과 자전거를 타다 실수로 넘어져 골절상으로 요양을 하게되고 니콜라이 교회를 중심으로 벌이는 반정부 운동의 일원이 된다. 그에 반해 아들은 정부 관리로 계속 승진을 하며 딸과 갈등을 일으킨다. 권력의 맛을 본 어머니 또한 아들의 편이다. 한편 손녀는 급진적인 반체제 운동의 일원이 되어 젊은 이들과 함께 떠돌이 생활을 한다. 이러한 주인공의 가족이 겪는 혼돈은 그 당시의 동독 상류 계급의 혼란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원래 니콜라이교회의 운동의 출발은 굴착기 먼지와 갈탄 매연으로 오염된 마을을 구하겠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여들자 정부에서는 이들의 활동을 감시하고 탄압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사람들이 니콜라이 교회로 모여들고, 이들의 힘은 광장에 모여 대규모 촛불 시위를 하게 된다.

이 영화에서 주목한 장면은 첫 번째로 장갑차에 치여 죽은 아이의 어머니가 아이의 죽은 자리에 꽃을 놓자 그때 고위 간부 (주인공의 아버지) 의 장례식이 이루어 지고 있는 데 그것을 본 주최 측의 간부가 꽃을 치우는 장면에서 동독의 사회주의 속에서 계급없는 평등한 사회가 아닌 오히려 계급과 착취의 자본주의 사회보다 더 악날한게 아닌가 하는 분노를 느꼈다. 자본주의 사회는 그래도 양심있는 몇몇 언론이 있어 이런 일이 생기면 그래도 고발하지 않은가? 두 번째로 촛불집회 장면을 거꾸로 본다면 우리나라 자본주의의 어떤 소위 말하는 진보주의의 비폭력 투쟁과 비교가 되는 모습이다. 따라서 어느 제도에서든지 정말 안타깝지만 완벽한 제도가 없고 이것은 역사적으로 어쩔수 없는 계급에 대한 반항과 투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콜라이교회에 대한 것인데 니콜라이 교회는 지금도 그렇지만 민중의 저항의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이곳에서 영화에서 보듯이 동독의 붕괴를 촉발시킨 촛불집회의 장소이다. 그래서 니콜라이교회는 동독의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저항의 곳, 좀더 확대 시키자면 체제에 저항하는 민중의 힘으로 상징된다.



양철북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을 영화화하여 20세기 초의 독일을 배경으로 한 영화이다. 당시 이 영화는 깐느 영화제와 아카데미 영화상에 빛나는 명작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비현실적인 모습과 함께 당시의 시대적 현실적 상황을 잘 그려내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비현실적 요소를 중간 중간에 개입하여 사회의 현상과 문제에 대해 희화화하면서 부각시키는 점과 열린 결말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는 작품이다. 필자는 이 영화를 독일 영화라는 측면에서 숨어있는 상황의 관계에 주목해 보았다.

첫 번째로 주목한 것은 이 영화에서 주인공은 자신이 의지로 성장을 하지 않는 모습이 나온다. 그리고 영화의 시점들이 주인공의 내면과 그 외의 3인칭 시점으로 번갈아 보여 주는데 주인공의 내면에서 생각하는 것과 영화의 카메라 시점에서 비춰주는 모습이 가끔 다른 상황 즉 방향으로 흘러 가는 경우가 있어서 주인공의 바라는 생각과 이상이 현실과는 동떨어짐을 나타내준다. 주인공은 아이러니컬하게도 목소리의 옥타브를 순식간에 끌어올려서 유리를 깨트리는 특수한 능력이 지닌 존재로 나온다. 그리고 북을 침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경우가 허다한데 이는 당시 사회에 대한 거부를 나타내어 준다.

두 번째로 주목한 것은 주인공과 그의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이다. 주인공의 출생 배경부터 아주 특이하게 단순히 도둑을 숨겨주려고 치마 속에 품어주다가 그 상황에서 관계를 갖고 어머니를 낳자 어머니는 자라서 친척관계가 되는 주인공의 폴란드계 삼촌과 관계를 가지며 군대간 사이에 독일계 사람과 관계를 가지며 주인공의 삼촌이 돌아왔을때는 불륜관계로써 지속된다. 이 상황은 주인공이 아주 어렸을때부터 지켜보는데 주인공이 계속 세 살에서 머무는 계기가 되며 그 당시의 바람직하지 못한 부부관계를 드러내고 있으면서 당시 암울한 독일사회의 비도덕적 요소가 드러낸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는 결국 파국으로 치닫고 주인공의 어머니가 뱀장어 사건이후 계속 날 생선만 먹으면서 식중독 또는 자살로 죽게 되는데 흔히 뱀장어가 남성에 좋다는 것에 착안을 한다면 이는 분명 당나귀 입과 뱀장어와의 더러운관계 즉 더러운 성생활을 묘사한다는 점에서 어머니는 이를 깨닫고 자살하려고 한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의 삼촌과 아버지가 사실상 주인공 때문에 죽게 된다는 점에서 주인공의 어머니에 대한 복수가 간접적으로 악마적인 요소로써 나타내어 진다. 그리고 주인공과 어머니가 죽게 되어 가정부로써 또는 아버니의 새어머니로서 나타내어지는 주인공과 나이가 같은 소녀와의 관계인데 아주 노골적으로 성생활을 주인공과 아버지 이렇게 삼각관계로서 가지게 된다. 하지만 결국 주인공이 아버지와 소녀와의 관계를 알게 되고 나서 틀어지게 되지만 마지막에 주인공이 다시 성장하게 되는 데 주인공이 정말로 소녀를 좋아하는 건지 단지 쾌락에 치중한것뿐 따르기만 하는 건지는 알수 없지만 소녀가 주인공을 데리고 떠난다는 점에서 알수 없는 관계로 나타내지지 않을까하는 열린 결말을 끌어내고 있다.

세 번째로는 주인공과 사회와의 갈등이다. 주인공이 어렸을 때부터 폴란드 인이라고 유치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아이들의 소변을 마시는 모습은 독일의 전체주의 혹은 집단주의를 연상케한다. 2차대전이 시작되고 끝나가는 과정 속에서 주인공의 가족을 포함한 주변 인물들의 모습에서 독일인의 소시민적이 모습을 비판하고 있다. 특히 아버지는 주인공의 삼촌이 폴란드 계임에도 불구하고 도와주지 않고 나치를 선봉하고 따르는 모습을 내비친다. 주인공은 나치 전당 대회에서 자신의 북을 통해 나치군의 단가를 왈츠로 바꾸는 등 나치가 전체주의를 만드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낀다. 주인공은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난쟁이들끼리 독일군 위로 공연에 뛰어 들게 되는데 결국 에는 주인공의 주위에는 항상 비극이 일어나는 것 처럼 결국 독일군이 연합군에게 완패 당하게 되는 비극을 낳게 된다.

2차 대전이 시작되고 2차 대전이 끝나는 상황에서의 주인공의 이야기를 나타내고 있는 영화 ‘양철북’은 당시 시대 상황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특히 시대의 흐름에 대한 독일 가정의 불완전하고 비도덕적인 성적의 삶과 나치즘에 의한 독일인의 전체주의 와 집단주의 그리고 사회에 불필요한 자에 대한 냉대와 이에 따라가서 신봉하는 독일인들을 잘 묘사했다. 그리고 비극이 따라다니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악마같은 존재인 오스카에게서 사회와의 미묘한 갈등은 기이한 상황을 연출하면서 어린 소년이 보는 시각에서 어른들의 삶들과 그 당시 현실상황을 보면서 독일인의 소시민적인 태도를 비판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렇듯 영화 ‘양철북’은 작고 사소한 장면에도 놓칠 수 없는 숨겨진 묘미를 찾는 즐거움을 낳게 해주는 영화인 것 같다.


베른의 기적


청소년국가대표출신 감독이 제작한 영화 ‘베른의 기적’은 2003년에 개봉하여 300만 관객을 동원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을 배경으로 세계 2차 대전이후 독일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았다. 독일인들은 물질적 파괴와 정신적 패배감으로 인해 세계적 무대에 제대로 나서지 못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한 이 영화는 러시아와 독일과의 전투로인한 포로로 인해 남자의 자리를 여성이 가장으로써 역할을 했다. 이런 전쟁출전으로 남자의 자리를 여성이 취하게 된것이다. 전쟁 직후 남자들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현실에 적응을 못해 가족간의 갈등을 이 영화에서는 잘 보여주고 있다. 1954년 당시의 독일은 자유롭게 동, 서독일에 왕래할 수 있었다. 영화의 장면중 ‘독일 소년은 울지 않는다’ 라는 부분에서 독일 국민의 심금을 울리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는 아들이 공산주의에 빠져 아버지와의 갈등과 전쟁이후의 전후세대간의 갈등을 잘 묘사하고 있다. 이렇게 독일은 전쟁이후부터 1990년 까지 동, 서로 나누어져 있었다가 1990년 이후 통일이 되었다. 하지만 통일후 경제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 이유는 동독의 낙후와 체제에 대한 갈등으로 정신적으로 적응을 하지 못함에 있다. 그리고 경제적 격차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이에 따른 추가 경제 비용이 많이 들었다. 영화에서 대표팀 차출하면서 많은 실업팀을 소개하게 되는데 이것이 나중에 1963년에 소개되는 분데스리가의 전신이다. *독일동독에는 독일의 강제 수용소가 있는데 이 곳에는 전쟁에 대한 경각심과 과거의 잘못된 점을 반성하는 모습이 있다. 일본이 전쟁에 대해 반성하지도 않고 뒤처리도 않는 다는 점에서 사뭇다르다. 독일은 통일후에 과거의 동독의 청산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동독인의 수치감으로인해 동,서독의 시민들의 갈등이 뒤따랐다. 이에 한국도 만약 통일하게되면 북한인들의 수치감은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구 동독의 청산은 독일 문학에서도 잘 나타나있는데 구 동독작가인 크리스타 볼프의 ‘남아있는 것’에서 크리스타 볼프 자신이 비밀경찰에게 감시당하는 것을 고발한 작품인데 오히려 이 작품에 나와있는 슈타인에 손을 잡은 것이 나타나있어서 크리스타 볼프 자신이 의도와는 다르게 도덕성에 대한 비난이 강하게 돌아오게 될 정도로 구동독의 과거청산작업과 그에대한 여러 가지 문제는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영화는 두개의 플롯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월드컵에 진출한 독일축구팀의 이야기, 다른 하나는 돌아온 전쟁포로아버지와 아들의 갈등과 화해이다. 물론 또다른 서브플롯으로 기자와 아내의 사랑이야기가 들어가 있기도 하지만 큰 비중은 아니라고 본다. 메인플롯은 전쟁포로에서 돌아온 아버지이다. 이 아버지는 전후 독일을 상징한다. 전쟁이란 승자의 입장에서 정리된다고는 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나라 독일에서 러시아를 핑계로 패자의 입장을 대변한다는것은 아주 아이러니컬했고 못마땅했다. 이것은 영화보는 내내 걸리긴 했지만.. 그래도 전쟁은 정치가들의 영역이오, 국민들의 피해는 또다른 영역이라는게 내 생각이다. 패전국이던 승전국이던 국민들의 고통과 피해는 별개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을테니. 포로에서 돌아온 아버지는 모든 면에서 가족과 마찰을 겪는다. 그 갈등은 토끼사건으로 화해모드에서 급반전을 겪는다. 이런류의 반전은 나비효과같은 3류 헐리웃 영화의 의도된 반전보다 훨씬 생생하다. 영화라는 예술의 근원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안에는 살아숨쉬고 움직이는 인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해와 용서 사랑이 남을 수 있는 것이다. 나비효과의 캐릭터는 화석화되고 비인간화되어 마치 게임의 캐릭터와 다를바가 없다. 이것이 내가 나비효과를 영화가 아닌 게임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표현방식이 달랐을뿐 어찌됐건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고 아들 또한 아버지를 사랑한다. 둘은 스위스로 가는 산 언덕에서 바지춤을 내리고 같이 소변을 본다. 그들은 어쩔 수 없는 가족이자 부자간인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좋아하는 것을 해주어야한다는 아버지의 의무를 이해하게 되고, 아들은 엄격한 아버지를 통해 어른으로 성장해야 한다는것을 배운다. 그런 성장의 고통을 통해 독일은 세계 최강국의 하나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글루미 썬데이


1935년 실화를 바탕으로 ‘슬픈 일요일의 노래’의 책을 원작으로 영화화 한 작품이다. 글루미 썬데이라는 제목 그 자체가 사로 모순적이기 때문에 이를 강조해 나간다. 1930년 1차 세계 대전 이후 재건 중에 앞으로 다가올 2차 세계 대전에 대한 암울하고 공허함이 잘 나타나고 있다. 중심인물은 일로나와 자보와 안드라슈 그리고 한스가 있다. 일로나는 페미니즘의 시각으로 수동적인 여자로 보여 지는데 꺾인 예술가이며 패배감에 쩌려있는 안드라슈와 안정적이고 자본가이며 상술에 능하고 영원한 이방인에 대한 모습을하며 결혼보다 돈을 중요시 여기는 유대인 자보를 사랑한다. 일로나는 지그프리트의 크림힐트같은 적극적인 독일여성의 모습이 잘 나타난다. 한스는 독일 기술에 대한 자부심과 사회적자생존에 대한 언급으로 사회상을 나타내며 약속을 지키고 책임을 지키는 모습을 나타내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기 까지하는 냉철한 존재이다. 이 영화에서 한스의 여자비서 에피소드는 사전에 나오지 않은 맞춤법에 대한 한스의 지적이 나오는데 이는 독일인은 법에 대해 안빠져나가려고함고 어떤 틀에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준다. 독일인이 유대인을 잡아가는 과정에서 독일인과 유대인의 차이점을 알수있는데 독일인은 포경수술을 하지않고 유대인은 할레라고하여 포경수술을 한다. 이 영화의 마지막에 여주인공 아들이 누구냐는 문제에서 만약 한스의 자식이라면 ‘오이디 푸스’ 신화를 모티프로 한다고 할수 있겠다. 이 영화에서 나타나는 존엄에 대한 문제가 나오는데 이는 독일 헌법 1조 인간의 존엄은 신성하다에서 알수있다. 이영화는 열린결말을 추구하는데 확증한 결말이 없으며 독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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